독서

이평선 조합 396개를 돌린 뒤에 읽은 『랜덤워크 투자수업』

2026.08.18 『랜덤워크 투자수업』 — 버턴 말킬 ★★★★

이 글은 개인 기록이며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저는 이동평균선 전략 봇을 만들면서 단기·장기 이평선 조합을 396가지 만들어 놓고, 과거 데이터에 전부 돌려서 수익률이 제일 높게 나온 조합을 채택했습니다. 올해 봄 그 봇들에서 손실을 보고 복기하다가 이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이 기술적 분석을 정면으로 반박한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차트를 눈으로 보고 감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코드로 짜고 데이터로 검증하는 사람이니까요. 그 구분이 착각이었습니다.

어떤 책인가

1973년 초판이 나온 뒤 50년 넘게 개정되고 있는 책입니다. 저자는 프린스턴 경제학자고, 주장은 초판부터 지금까지 하나입니다. 공개된 주가에는 알려진 정보가 이미 반영돼 있어서, 꾸준한 초과수익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불가능하다. 그러니 수수료 낮은 인덱스를 사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처방이 한 문장이라 책이 왜 이렇게 두꺼운가 싶은데, 분량의 대부분은 “그래도 나는 예외 아닐까”를 하나씩 닫는 데 씁니다. 기술적 분석, 종목 분석, 액티브 펀드, 유행하는 자산군까지 차례로 다룹니다.

동전을 던져서 만든 차트

제일 유명한 대목은 동전 던지기 실험입니다. 학생들에게 동전을 던져 가짜 주가 그래프를 만들게 한 뒤, 그 그래프를 차트 분석가에게 보여줍니다. 분석가는 지지선과 저항선을 짚고 추세 전환을 읽어냅니다. 정보가 0인 그림에서요.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패턴은 데이터가 아니라 보는 사람 쪽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도 남 얘기로 읽었습니다. 나는 눈으로 안 보고 백테스트로 검증하잖아, 하고요.

검증이 아니라 발굴이었다

착각의 정체는 다음 장을 읽다가 드러났습니다. 말킬이 문제 삼는 건 선을 손으로 긋느냐 코드로 긋느냐가 아니라, 과거 가격에서 미래를 읽어낼 수 있다는 가정입니다. 저는 그 가정을 그대로 둔 채 도구만 바꿨습니다.

게다가 조합을 396개나 시험하면 그중 하나는 우연히 잘 맞습니다. 시험 횟수를 늘릴수록 우연히 좋은 성적이 나올 확률도 같이 올라갑니다. 제가 한 건 가설을 검증한 게 아니라, 과거에 제일 잘 맞았던 하나를 발굴한 것에 가까웠습니다. 백테스트 결과는 그 조합이 앞으로도 통한다는 근거가 아니라 근거처럼 보이는 숫자였고, 확신만 키웠습니다.

동전 차트를 보고 지지선을 읽는 분석가와 제 차이는, 제 쪽이 훨씬 그럴듯한 숫자를 첨부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돈의 심리학』을 읽고 정리했던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자동화는 실행에서 감정을 빼주지만, 규칙을 설계하는 순간의 낙관은 그대로 남습니다. 그때는 그게 “적립식은 안전하다”는 믿음이었고, 이번에는 “최적화된 조합에는 근거가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봇을 껐나

안 껐습니다. 여기서 “다 접고 인덱스만 샀습니다”로 끝내면 깔끔하겠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바꾼 건 역할 분리입니다. 장기 자산은 인덱스 적립으로 두고 제 판단이 개입할 여지를 없앴습니다. 봇은 규모를 제한한 실험으로 성격을 바꿨고, 방어 로직을 전 봇에 균일하게 넣었습니다. 손실을 키운 건 전략의 우열이 아니라 방어가 없던 봇들이었으니까요.

말킬을 받아들인다는 게 매매를 끊는다는 뜻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 전략이 시장을 이긴다”는 기대를 계좌 크기에 반영하지 않는 것에 가깝습니다. 돌려보는 건 자유지만, 백테스트 성적을 믿고 비중을 키우면 그때부터 동전 차트를 읽는 사람이 됩니다.

아쉬운 부분

뒷부분에서 스스로 문을 열어줍니다. 앞의 수백 쪽을 “당신은 시장을 못 이긴다”에 쓰고는, 후반 실전 가이드에서 종목 고르는 규칙과 자산군별 조언을 꽤 구체적으로 줍니다. 저자 입장에서는 현실적인 안내겠지만, 독자는 여기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특히요.

개정판이 쌓이면서 두꺼워졌습니다. 판을 거듭할 때마다 그 시기의 유행 자산군이 한 챕터씩 붙습니다. 최신 사례를 유지하려는 노력인 건 알겠는데, 핵심 논증은 앞쪽 몇 개 장에서 이미 끝납니다.

미국 독자 기준입니다. 세제와 계좌 이야기는 한국에서 미국 ETF를 사는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고, 환율이라는 변수도 이 책에는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 전략을 코드로 짜는 사람 — 저처럼 “나는 감으로 안 하니까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정확히 그 착각을 다루는 책입니다.
  • 차트를 보고 매매를 시작하려는 사람 — 앞부분만 읽어도 값을 합니다. 기분은 나쁩니다.
  • 이미 인덱스로 정착한 사람 — 굳이 다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새로 배울 게 많지 않습니다.

한 줄 요약

과거 가격에서 미래를 읽을 수 있다는 믿음은 도구를 바꿔도 살아남습니다. 손으로 그리던 걸 코드로 옮기면 방법론이 바뀐 것 같지만, 바뀐 건 그럴듯함의 정도뿐이었습니다.

봇 코드를 지운 건 없습니다. 대신 백테스트 결과를 볼 때 조합을 몇 개나 시험했는지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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